18살이 되던 해 동네어른들과 친척 어른이 저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를 돈 500만원에 부잣집에 팔았습니다.
저는 3년 6개월간 외부와 단절된 채 갇혀 노예처럼 살았고, 주기적으로 강제 임신 시술을 받았습니다.
인권 운동을 통해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장애여성이 아니었다면 팔려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웠고, 도망갈 용기도 없고, 항상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22살에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던 중에 저는 시술을 해주시던 산부인과의사의 조언으로 ‘더 이상 이런 삶은 살지 않겠다’ 생각하며 도망쳤습니다.
이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권 운동을 통해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가치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저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었고, 저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저 같은 장애여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며 일을 하고 싶었지만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가 없기에 거리에서 음식장사를 했습니다.
길거리의 뽑기 장사부터 시작해서, 포장마차. 그리고 식당까지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고, 집도 사면서 일자리가 바로 내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내 일(my work), 나의 일을 통해, 내일(tomorrow), 미래를 여는 멋진 여성
장애가 있든 없든 여성들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그러나 이런 법과 제도는 도구일 뿐 보장된 권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고, 스스로 연대하여 국가와 국제사회를 향해 촉구해야만 합니다. 장애여성들은 비정규직, 저임금 작업장은 물론, 전쟁터 같은 노점과 영업현장에서 일을 통해 매일매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일이 있어서 행복하며 나누면서 살고 싶다고. 장애여성들은 단지 개발되지 못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고, 스스로 연대하여 국가와 국제사회를 향해 촉구해야만 합니다.계획하는 모든 것이 장애 여성과 그들의 희망인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여러 도움의 손길은 보다 더 큰 감동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 사회의 장애여성이 아픔과 편견을 깨고 함께 일 할 수 있는 동료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해 주시길 바랍니다.